할아버지 교육으로 조선의 의병장이 되다

 격대교육은 남녀 역할이 엄격히 구분되었던 조선시대에도 흔했다.

조부모가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명문가의 사대부이자 뛰어난 문장가인 이문건도 손자가 태어나자마자 아이를 도맡아 키웠다. 그리고 무려 17년간 손자를 교육하며 쓴 일기 <양아록(養兒錄)>을 후대에 남겼다.

양아록은 조선시대 사대부가 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육아일기이다.

할아버지에 의한 격대교육의 과정을 소상히 알 수 있어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문건은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16세기 중종, 명종 시대를 살아간 관료이자 학자이다.

그의 집안은 고려 말부터 재상을 여러 명 배출할 만큼 이름 높은 명문가였으며, 정승과 판서가 된 인물이 16명, 문과에 급제한 자가 75명이나 될 정도로 학식이 높은 가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화에 휘말려 그의 스승인 조광조가 사약을 받으면서 이문건의 인생도 큰 위기를 겪게 된다. 그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형벌을 받아 몇 년을 허망하게 보냈으나 마침내 사면이 되어 과거에 합격했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인생이 순탄한 길로 접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인종마저 빨리 죽으면서 명종의 외척들에게 정치적 탄압을 받아 성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문건은 아이를 여럿 낳았으나 천연두로 일찍 사망하고, 둘째 아들이 <양아록>의 대상인 손자 수봉을 낳았다. 그때가 그의 나이 58세였다. 이문건은 양아록을 쓴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이를 기르는 일까지 꼭 기록할 필요는 없지만 기록하는 이유는 할 일이 없어서이다.

노년에 귀양살이를 하니 벗할 동료가 적고 생계를 꾀하려고 해도 졸렬해서 생업을 경영할 수 없으며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고독하게 거쳐하는데 오직 손자 아이 노는 것을 보는 낙으로 시간을 보냈다. (…) 습좌(習坐), 생치(生齒), 포복(匍匐) 등의 짧은 글을 뒤에 기록하여 애지중지 귀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아이가 장성하여 이것을 보게 되면 아마 글로나마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문건은 손자 수봉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각별했다.

손자의 출생과 성장은 불운에 처한 그에게 유일한 행복이었으며, <양아록>은 손자에 대한 각별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손자가 전염병에 걸려 아파할 때는 죽 먹이고 똥 누이는 일까지 일일이 도맡아 했다.

그러자 아이 역시 애정의 깊이를 알아채고, 할아버지가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졸려도 잠을 자지 않고 문 앞에서 맞이하기 위해 기다렸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지극정성 속에서 손자는 훗날 훌륭한 인재로 성장했다.

수봉은 이문건이 죽고 난 뒤 임진왜란 때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이 공로를 인정해 조정에서 상을 주려고 했으나 수봉은 남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며 이를 사양했다. 수봉이 겸양(謙讓)의 미덕을 갖추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겸양은 공자가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한 필수 조건이자 성인의 도리로 강조한 덕목이다.

수봉의 겸양은 격대교육으로 인해 아이의 인격이 바르게 형성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할아버지의 지혜로운 교육이 큰 인물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이문건은 할아버지로서 손자 교육을 잘 해냈지만 아버지 역할에는 미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 <묵재일기>를 살펴보면 매일 아들과 씨름하며 분노를 참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문건은 열병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못하는 둘째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하나 뿐인 자식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일까? 그의 훈육은 정도가 심했다.

시를 해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화가 치밀어서 나무가 부러지도록 때리는가 하면, 대나무로 매질을 하기도 하고, 뺨을 발로 밟거나 머리카락을 한 움큼 뽑아 버린 때도 있었다.

 이문건의 사례처럼 부모가 교육에 나서면 이성을 잃는 경우도 생긴다.

아이에 대한 기대가 높고 욕심이 앞서서 자녀가 잘 따라오지 못하면 금세 질책과 비난을 퍼붓는 것이다. 아이가 조금만 반항해도 크게 낙담하고 감정에 휩쓸리기도 한다.

때로는 자녀교육보다 격대교육이 더 용이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이문건이 아들보다 손자를 더 잘 키운 것처럼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자기감정을 잘 통제하는 때가 아이를 맡아서 키우고 가르치기 좋은 시기다.

 인생에서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은 엄격한 부모의 가정교육이나 똑똑한 선생님의 영재교육이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한한 애정과 희생은 인성교육으로 이어진다.

더불어 우리 인생의 목적의식은 삶 속에서 형성된다.

목적의식을 가르치는 것은 젊은 부모로서 한계가 있다.

조부모는 아이에게 삶의 철학을 알려줄 수 있는 존재다. 노년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것만으로 살아있는 인문학 체험 교육이 가능하다.